독서리뷰 세상을 바꾼 다섯가지 상품 이야기

상품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거대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그 사실을 간과해왔다. 수많은 상품들 가운데 세상을 뒤흔든 소금,모피,보석,향신료,그리고 석유, 이다섯 가지 상품을 중심으로 세계 경제와, 인류의 삶을 통찰하는 새로운 시각을 바로볼 수 있게 된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지금까지 유용하게 쓰이는 상품들의 역사는 단지 책속에서만 볼 수 있는 박제된 과거의 기록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보완해 미래의 새로운 상품 교역의 활로를 이끌어낼 수 있는 진행형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소금

소금은 작은 도시국가로 시작한 로마 남부 이탈리아 반도의 조그만 어촌에서 소금 거래를 하던 몇몇 상인들이 모여 만든 나라였다.로마가 발전한 이유 중 하나도 소금이었다. 특히 인근 염전과 관계가 깉다. 페니키아 시대 부터 로마 근교 테베레 강가에 건설된 인공 염전에서 소금이 만들어 졌다. 이것이 유럽 최최의 인공 해안염번이다. 당시 북유럽 내륙 염호나 암염 갱에서 불로 구어만든 소금은 생산비도 높았지만 운송비가 특히 비쌌다. 낙타 네 마리가 싣고 온 소금 운송비로 세 마리 낙타가 싣고 온 소금을 주어야 했다. 게다가 오는 동안에 통행세 수입세와 관세 등을 많이 물어야 했다. 따라서 그 무렵 소금은 생필품이면서 동시에 대단히 비싼 귀중품이었다. 이런 큰 이문이 남는 소금은 무역에서 문 문제는 강지간의 운송이었다. 테베레 강 하구의 소금은 하천을 통해 바로 로마 시내로 운반되었다. 이소금이 로마 건국의 일등 공신이었다. 하천을 통해 배로 우반된 소금은 품질도 좋았고 가격도 저렴했다. 이로써 로마는 소금 유통의 중심지가 되어 소금을 대륙으로 수출했다. 이 수출 길이 로마 발전의 원종력이 된 그유명한 '소금길'이다.

소금을 나르는 상인들은 두가지 골칫거리가 있었다. 울퉁불퉁한 길과 도적들의 공격이었다. 다행히도 영주들이 자기 영토를 지나갈 때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주었다.우선 길을 평평하게 잘 닦아 마차가 불편 없이 왕래하게 해주었다. 또 그것 기사들이 안전을 책임쳐 주었다. 물론 통행세를 내야했다. 이것이 바로 악명 높은 '소금 길 세금'이다. 소금상인들 덕택에 많은 돈을 번게된 영주들은 소금길을 경쟁적으로 만들어 통행세를 거두었다. 그리고 소금길이 유럽 대륙 전역에 퍼져나기기 시작했다. 소금장수 들이 소금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자 이를 눈여겨본 귀족들이 동참했고 나중에는 수도원까지 합세했다 그 뒤 소금 길만 가지고 장사하던 도시들이 소금무역에 직접 참가하면서 도시의 재정을 점점 더 불어났고 전내제도로 자리 잡게 된다.소금수출이 국가의 전매사업이 되면서 로마는 자연스럽게 부강해졌다. 그러자 사람들이 로마로 몰려들었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도 소금 길에서 유래한 것이다.도대에는 소금은 가진 자가 돈과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로마가 소금으로 일어났고 당시는 소금이 귀해 이윤이 높아 대부분 권력자의 전매품이었다. 소금이 흔해진 것은 최근에 들어와서이다.


모피

인간이 처음 몸에 옷을 걸친것은 동물의 털가죽이다. 동물의 모피는 사냥의 기념품이자 최조의 의복이었다. 모피는 고대부터 신청하고 종교적인 가지를 지녔다. 이집트 에서는 파아오만이 사자 꼬리로 만튼 허리띠를 착용할 수 있었다.모피가 신성하고 귀한 소재였던 만틈 그값어치가 상당했고 인구가 늘어나고 공급이 제한되면서 모피는 대표적인 사치품이 되었다.

모피사냥 덕북에 개발된곳이 시베이리와 북아메리칻. 유럽에서 모피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중세에 동방무역을 주도했던 유대인들에 의해서다. 당시 유럽인들은 귀족들을 우해서 동물을 사냥했다. 그로 작은 동물들이어서 외투 한 벌을 만들려면 다람쥐 수백마리, 여우수십마리가 필요해 엄청난 숫자의 동물이 죽임을 당했다. 

결국 서유럽에서 모피동물이 멸종의 위기를 맞자 사람들은 시베리아와 그 너머 극지방 까지 가지 시작했다. 거리가 멀어지자 자연히 국제무역 시스템이 갖춰졌다.. 이러한 모피 국제무역은 근대 러리상가 시베리아 까지 땅을 넓힐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모피사냥꾼들의 시베리아 개척 속도는 군대의 진격 속도보다도 빨랐다. 러시아는 담비, 비버, 늑대 영, 다암쥐가주을 수출했다. 18세기 말에는 광할한 시베리아 숲에서 살던 모피동물들이 거의 거취를 감췄다. 인간의 욕심으로 동물이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캐나다에선 매년 30만 마리의 내외 바다표범 사냥이 허용되고 수많은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바다표범 사냥이 머추지 않는 이유는 털가죽과 오메가 -3 지상산이 풍부한 기름 때문이다. 현재 모피 의류 제조를 위해 4천만 마리의 밍크가 사육되고, 1천만 마리의 여우가 사육되거나 덫에 잡힌다. 여우코드 한 벌에 20마리의 여우,밍크코트 한벌에 55마리의 밍크가 필요하다. 이렇게 매년 1억말리의 동물이 모피제조를 위해 죽임을 당한다.


보석

다이아몯는 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ADAMAS'에서 나왔다. 이는 '정복할 수 없다'라는 뜻으로 다이아몬드는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는 깨뜨릴 수 없는 신성한 존재라는 뜻이다.

본격적으로 다이아몬드 생산은 1866년 남아고 오렌지 강 유역에서 21캐럿짜리 유레카 다이아몬트가 발견되고 나서부터다. 이어 대규모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어 근대적 채굴이 채택되었다 대량 발굴되기 시작한 다이아몬트는 널리 대중화되었다. 그 뒤 남아공에 다이아모드 러시가 시작되었다. 드비어스는 원래 남아공 원주민 형제의 이름이다. 농사꾼이었던 이들 형제는 한 농장을 50파운드에 매입했는데 우연히 그 농장에서 다이ㅇ몬드가 발견되었다. 드비어스 형제는 이농장을 무려 6,300파운드에 팔았고, 농장을 팔면서 농장의 명칭을 자기들의 이름인 '드비어스 광산'으로 영구히 불여줄 것을 요구했다. 오늘날 다이아몬드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드비어스는 이렇게 탄생했다.

드비어스 형제로부터 다이아몬드 농장을 사들인 사람은 영국인 세실 로즈였다 농장밑네 엄청난 다이아 몬드 원석으로 거부가 되었다.

로즈는 정계에서 은퇴한 두 ㅣ자신의 이름을 따 '로즈 장학재단'을 설립해따.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블레어 전 영국 초리를 비롯한 많은 영재들이 받은 ;로즈장학금'이 바로 로즈 재단에서 지급한 장학금이다.

흑인노동자의 임금을 쥥짜 대형기업으로 성장한 드비어스 사는 대공황이 닥치자 전 세계 거의 모든 다이아몬트를 헐값이 사들였다 동시에 파산한 광산회사들을 사들여 독점을 위한 토대를 닦았다. 

드비어스는 거의 100년간 전 세계 다이아몬드 산업을 주물러 왔다. 역사적으로 보석 산업은 유대인이 주도했다. 유대계 신디케이트인 '드비어스'는 다이아몬드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다.


향신료

유럽에서 육류의 맛을 내는데 동양의 향신료가 필수적이었다. 향신료 중에서도 인도의 후주, 스리랑카의 계피, 동닌도제도의 육두구, 몰루카 제도의 정향이 대표적이었다. 그런데 14세기초 무력을 중시해 실크 로드를 보호하던 원나아의 힘이 떨어진 틈을 타 오스만 제국이 유럽과 동방의 무력로르 차단했다.그러자 유럽에서 후주 등 동방상품의 가격이 폭등했다. 생산지의 가격의 100배는 보통이었고,육두구의 경우 600베 까지 치솟았다. 동양의 향신료만 얻을 수 있으면 그야 말로 대박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1498년 바스코 다가마의 포루투칼 함대가 향신료를 찾아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처음으로 아프리카 동쪽 해안에 남단 희망봉을 돌아 처음으로 아프리카 동쪽 해안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도양을 가로질러 인도 캘리컷에 도착했다. 그 무렵의 인도는 유럽보다도 훨씬 풍요로운 국가였다. 특산물인 향신료 이외에도 각가지 수공업이 발전되어 있었다. 바스코 다 가마 일행은 향신료 등 귀중한 동양의 산물을 가득 싣고 향래를 시작한지 2년만에 리스본에 도착 인도에서 가져온 상품들로 바스코 다 가마 일행은 엄청난 이득을 남겼다. 신항로 개척의 선두주자인 모르투갈은 후주와 비단 등 동방무역을 독점해서 거대한 부를 얻었다.

육두구와 정향은 후주보다 더귀했다. 육두구 나무는 몰루카에 속한 반다 제도에서만 자랐다. 반다 제도는 자카르타에서 동쪽으로 약 2500킬로 미터 떨어진 일곱 개의 섬이다. 또한 두 섬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향나무가 자라는 곳이었다. 수세기 동안 몰루카 제도 주민들은 육두 구와 정향을 재배해서 이곳을 방문하는 아랍, 말레이,중국 상인들에 팔았다. 각 유통단계를 거칠 때마다 향신료의 가격은 두 배로 뛰었다.


석유

석유산업의 대명사, 존데이비슨 록펠러는 1839년 뉴욕에서 약품 판매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다설 살때 록펠러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작은 곡물위탁판매회사의 경리사원 보조로 취직했다. 록펠러는 그렇게 해서 번 돈 1천 달러와 아버지로 부터 빌린 1천 달러를 합해 친구와 함께 1859년 열아홉살때 곡불중개회사를 차렸다. 1861년 남북전쟁이 터지자 그는 북군에 소금과 돼지고리를 팔아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같은 해 조지 비셀이 펜실베이니아에서 석유 시추에 성공한다.석유채굴사업은 유가 변동 폭이 크고, 석유발견에 실패할 확률도 많아 안정적이 ㄴ산업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진짜 돈'은 석유채굴업이 아니라 운송과 정유를 담당하는 중간상이 번다는 것을 간파했다. 록펠러는 골물중개회사를 계속하면서 1863년 오하이오 주클리블랜드에 정유소를 설립했다. 당시에 정제시설이란 뒷마당에 설치된 과학 실험실 정도 규모에 불과 했다. 그러나 이게 돈이 되었다. 검은 액체가 그이 정유공장을 거쳐 전국으로 팔려나갔다. 무분별한 유전 개발로 석유가 쏟아져 나오면서 석유 가격은 폭락을 거듭했다. 미국은 석유 대체를 위해 원자력과 대체 에너지 산업에 심혈을 기울이던 미국이 새로운 에너지원의 등장으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천연가스의  일종인 셰일가스가 폭풍의 핵으로 혜성같이 등장한 것이다. 셰일가스는 진흙과 모래가 단단하게 굳어진 암석층,즉 셰일층에서 뽑아낸 천연가스다. 셰일가스 생산이 붐을 이루면서 미국은 단번에 세계의 최대 석육 생산국이 되었다.


저가 홍익희 님의 세상을 바꾼 다섯가지 상품이야기 신선한 내용으로 소금을 과 향신료는 예전부터 귀한 상품이었다고 알고는 있었는데

모피,보석은 은 생소한 내용이어서 새로운 내용을 알게 된거 같다.

옛날 상인들은 어떤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고 회사를 키워 나갔는지에 대한 심오한 내용도 실려있어 많은 공부가 된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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